동화책에서 부엌 도구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설정을 보면 황당하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오히려 할머니 집 부엌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제가 어릴 적 할머니 댁에서 지낼 때도 부엌의 가마솥, 주걱, 사발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제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거든요. 『언제나 다정한 죽집』은 겉보기엔 부엌 도구들의 모험담이지만, 실제로는 할머니의 삶과 가족의 애환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가마솥의 오만함과 제 어린 시절 철없음
일반적으로 동화는 권선징악의 교훈을 담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진짜 와닿는 건 캐릭터의 솔직한 결점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가마솥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부엌의 왕처럼 지내던 존재로, 주걱이나 사발 같은 다른 부엌 도구들에게 거만하게 굽니다. 고양이 팥양이의 꾹꾹이 덕분에 부엌 도구들이 말하고 움직이는 능력을 얻게 되었을 때도, 가마솥은 여전히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외롭게 지냅니다.
여기서 '의인화(擬人化)'란 사물이나 동물에 인간의 성격과 감정을 부여하는 문학적 기법을 의미합니다. 이 작품에서는 부엌 도구들에게 각각의 성격과 관계를 부여함으로써, 독자들이 더 깊이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솔직히 이 부분이 예상 밖으로 제 어린 시절과 겹쳤습니다. 저도 첫 손주로 태어나 할머니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아이였거든요. 맞벌이하시던 부모님 대신 조부모님과 살았던 저는, 마치 가마솥처럼 그 집안의 중심에 서 있는 아이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 한글을 가르쳐주시고, 할머니께서 밥을 차려주고 씻겨주고 놀아주셨던 그 시절, 저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였습니다. 그때는 가난했지만 할머니가 설탕에 건빵을 튀겨주시거나 누룽지를 더 익혀 깐밤을 해주시면 그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간식이었습니다. 동네에서도 꽤 유명했던 저는 할아버지께서 동네 유지셨고 막내 외삼촌이 싸움을 잘했기 때문에, 장난을 쳐도 눈감아주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마솥처럼 오만했던 건 아니지만, 제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천방지축 아이였던 건 맞습니다.
아동 발달 심리학에서는 이 시기를 '자기중심성(Egocentrism) 단계'라고 부릅니다. 자기 중심성이란 아직 타인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시각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발달 단계를 말합니다. 6살이 채 안 된 아이가 할아버지가 왜 눈물을 흘리시는지, 왜 눈을 감고 계신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공부 열심히 하라"라고 하셨던 말씀만 기억에 남는데, 지금은 그게 마지막 당부였다는 걸 압니다.
위기와 화해, 그리고 할머니께 잘해드리지 못한 불효
작년 겨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슬픔에 잠겨 몸져눕자, 죽집은 큰 위기를 맞이합니다. 할머니의 딸들이 죽을 끓여 할머니의 기운을 차리게 하지만 죽집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다시 겨울이 찾아오고, 건물주 김 사장님은 할머니에게 동짓날까지만 영업하고 가게를 비워달라고 통보합니다(출처: 라이브위키). 대형 죽 프랜차이즈가 이 자리를 원한다는 것이었고, 할머니는 망연자실하여 죽집을 정리할 결심을 합니다.
여기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현상이 떠오릅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낙후된 구도심 지역이 활성화되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래 그곳에서 장사하던 소상공인들이 쫓겨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할머니의 죽집이 대형 프랜차이즈에 밀려나는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실입니다. 제가 직접 살던 동네에서도 30년 넘게 자리를 지키던 작은 식당들이 하나둘 사라지는 걸 봤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가마솥과 부엌 친구들은 자신들도 버려질 처지가 될 것임을 깨닫습니다. 가마솥은 그동안의 오만했던 행동을 뉘우치며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함께 위기를 극복하자고 제안합니다. 주걱, 사발, 홍두깨는 가마솥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힘을 합쳐 대책을 찾기로 합니다. 바로 그때 고양이 팥양이가 금빛 방울 목걸이를 하고 나타나 작은 종이 조각을 떨어뜨립니다.
할머니가 쪽지를 펼치려는 순간, 50인분의 단체 주문 전화가 걸려와 모두가 분주해지고 쪽지는 잠시 잊힙니다. 힘든 단체 주문을 마친 후, 부엌 친구들은 팥양이가 가져온 쪽지를 읽기로 합니다. 선반에 있던 인두가 쪽지를 챙겨갔음이 드러나고, 글을 읽을 줄 아는 인두는 다른 친구들을 위해 쪽지를 읽어주겠다고 합니다.
이 장면을 읽으며 제 어린 시절이 또 떠올랐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떨어져 살다가 같이 살다가를 반복했던 시절, 저는 할머니께 얼마나 힘든 존재였을까요. 일반적으로 손주는 조부모에게 기쁨을 준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그건 손주가 철이 들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저처럼 철없던 아이는 할머니께 부담이었을 겁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할머니께 잘해드리지 못한 불효가 지금도 마음이 아픕니다.
책 속 가마솥이 친구들에게 사과하고 화해하는 장면처럼, 저도 할머니께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못 드렸습니다.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은 건, 할머니께서 저를 키우시느라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가마솥이 위기 앞에서야 자신의 오만함을 뉘우친 것처럼, 저도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할머니의 희생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책 속에서 부엌 도구들이 협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족이라는 게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 관계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낍니다. 주요 등장 부엌 도구들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가마솥: 할머니의 사랑을 받지만 오만했다가 위기에서 성장하는 캐릭터
- 주걱: 가마솥과 가장 가까이 일하지만 무시당했던 조력자
- 사발: 음식을 담아 손님에게 전달하는 소통의 매개체
- 홍두깨: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하는 성실한 조연
- 인두: 글을 읽을 줄 아는 지혜로운 존재
이 책은 할머니의 죽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가족의 의미, 소상공인의 어려움, 그리고 성장과 화해의 과정을 모두 담아냈습니다. 제가 직접 겪었던 할머니와의 시간이 있었기에, 이 이야기가 더욱 진하게 와닿았습니다. 어린이 독자들에게는 협력과 사과의 중요성을, 어른 독자들에게는 잊고 살았던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작품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으로 깊은 울림을 주는 동화였습니다.
참고: https://livewiki.com/ko/content/ever-kind-porridge-ho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