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기억의 의무, 역사적 트라우마, 세대 간 상처)
솔직히 저는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처음 펼쳤을 때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제목부터 묘하게 가슴을 눌렀고, 첫 문장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부터 『소년이 온다』의 그 겨울이 떠올라 숨이 막혔습니다. 이 소설은 5.18 민주화운동과 제주 4.3 사건이라는 두 개의 국가폭력을 다루지만, 단순한 역사 재현이 아니라 상처가 어떻게 세대를 관통하며 전이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경하와 인선, 두 여성의 삶을 통해 우리는 묻게 됩니다. 과거의 고통을 기억하는 것이 과연 치유일까요, 아니면 또 다른 상처일까요?

1장. 기억의 의무: 왜 우리는 과거를 지워서는 안 되는가
소설 속 경하는 5.18 민주화운동 관련 책을 낸 후 극심한 우울에 시달립니다. 그는 유서를 반복해서 쓰고 찢으며 삶의 끝을 준비하지만, 친구 인선의 부탁 하나로 제주도로 향합니다. 여기서 '기억의 의무'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들의 고통을 현재의 언어로 번역하고 증언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출처: 국가인권위원회 과거사 정리 사업).
저는 1980년대 산동네에서 자랐습니다. 집 근처 시장 어귀에 늘 앉아 이유 모를 소리를 하던 아저씨, 날마다 소주병을 들고 다니던 뒷집 이모. 그분들의 얼굴에는 제가 이해할 수 없는 어둠이 있었습니다. 매년 봄이면 여러 곳에서 곡소리가 들렸고, 저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야 깨달았습니다. 그 어둠이 국가폭력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경하가 꾼 꿈에서 나무들이 묘비처럼 서 있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눈을 맞고 있습니다. 이는 집단학살의 무차별성을 상징합니다. 제주 4.3 사건 당시 중산간 마을에서는 나이, 성별을 가리지 않고 학살이 자행되었고, 109곳의 마을이 재건되지 못한 채 '잃어버린 마을'로 남았습니다(출처: 제주 4·3 평화재단).
책을 읽으면서 저는 자꾸 물었습니다. 왜 우리는 이토록 아픈 기억을 붙들고 살아야 할까요? 지우고 잊으면 안 될까요? 하지만 인선이 손가락 사고 후 겪는 장면이 답을 줍니다. "피가 멈추지 않게 하는 거야.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해." 3분마다 상처를 찔러 신경이 죽지 않게 하는 고통스러운 치료. 이것이 바로 기억의 방식입니다. 아프더라도 계속 자극해야 연결이 끊기지 않습니다.
2장. 역사적 트라우마: 세대를 넘어 전이되는 상처의 메커니즘
인선의 어머니는 제주 4.3 사건 당시 마을 사람들의 차가운 뺨에 눈이 녹지 않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기억은 평생 악몽으로 되돌아왔고, 결국 치매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세대 간 트라우마 전이(Intergenerational Trauma Transmission)'라는 개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도 부모 세대의 트라우마를 무의식적으로 물려받는 현상을 말합니다. 심리학 용어로는 '대리 외상(Vicarious Trauma)'이라고도 부르는데, 쉽게 말해 타인의 고통을 듣고 보는 것만으로도 자신에게 상처가 새겨지는 것입니다.
인선은 어머니가 왜 그토록 어두웠는지, 왜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지 못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집을 나갔고, 공사장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었습니다. 살고 싶어서 가출했다는 인선의 말이 제 가슴을 찔렀습니다. 저 역시 그랬으니까요. 가난과 어둠이 가득한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 가난과 어둠은 단순히 경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1980년대 대한민국을 살았던 사람들 모두가 짊어진 보이지 않는 짐이었습니다.
소설에서 인선이 손가락 두 개를 잃고 "조그마한 상처에도 이렇게 아픈데 맞아 죽은 사람들은 얼마나 아팠을까"라고 생각하는 장면은 정말 소름 돋았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한 건 아니지만,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몸이 움츠러들었습니다. 국민보도연맹 사건, 제주 4.3 사건, 5.18 민주화운동. 이 모든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이 느꼈을 고통을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인선의 어머니가 꾸던 '뺨에 눈이 녹지 않는 꿈'은 단순한 악몽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은 자들의 체온이 사라진 순간, 생명이 끊어진 그 순간을 평생 반복해서 목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악몽은 딸인 인선에게도 전이되어, 인선 역시 평생 설명할 수 없는 어둠을 안고 살아갑니다.
3장. 세대 간 상처: 덮는다고 사라지지 않는 것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은 평행 우주처럼 느껴집니다. 인선과 새 아마가 살아있는 비현실적인 상황. 그런데 이게 정말 비현실일까요? 저는 이 장면을 읽으며 작가가 우리에게 묻는다고 느꼈습니다. "당신은 어떤 세계를 선택할 것인가?" 망각의 세계인가, 기억의 세계인가.
아마와 아미의 무덤이 같다는 설정은 제주공항 활주로 아래에서 발견된 3,829구의 유골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체가 중첩되어 묻혔다는 것,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이 지워지고 숫자로만 기록되었다는 뜻입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다루는 질문처럼, "우리는 조상의 죄를 속죄해야 할까요?" 저는 이제 답을 알 것 같습니다. 속죄가 아니라 기억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삶을 복원하고, 이름을 불러주고, 고통을 증언해야 합니다.
인선이 다큐멘터리스트로서 베트남전 한국군 성폭력 생존자, 1940년대 만주 독립군 할머니의 치매 일상을 기록한 것처럼, 기록하고 증언하는 행위 자체가 저항입니다. 제가 실수한 부분이 있었는데, 예전에는 과거사를 다루는 작품들이 '너무 무겁다', '우울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깨달았습니다. 무거운 게 아니라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소설 말미에 경하와 인선이 촛불을 들고 눈밭으로 나가는 장면. 인선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경하의 모습은, 과거 흔적을 지우려 했던 이들과 대비됩니다. 발자국은 사라지지만, 우리가 기억하면 없어지지 않습니다. 불꽃이 다시 솟는 장면은 죽음이 아닌 삶과 사랑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저는 1980년 5월 이전에 태어났어도, 그 아픔을 직접 겪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본 80년대는 여전히 상처투성이었습니다. 코 흘리고 까만 얼굴로 뛰어다니던 촌동네, 가난 속에서 자신을 돌볼 틈도 없이 살았던 사람들. 그들 모두 그 시절의 그림자 아래 있었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희생된 모든 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동시에 가슴속에 일어났고, 울컥했습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목처럼, 우리는 작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기억하고, 증언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이자 의무입니다. 덴마크 국적의 제주 출신 비디오 아티스트 재인 진 카이젠의 2024 올해의 작가상 전시 작품 '이어도'처럼, 바닷속에 버려진 총과 시신 위로 생명이 자라나듯, 우리의 기억도 그렇게 새로운 생명을 틀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세계를 선택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