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모노 독후감 (악의 평범성, 수평적 조직, 우정의 유통기한)
우정에도 유통기한이 있을까요? 저는 대학 시절 동아리 활동을 하며 이 질문의 답을 찾으려 애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혼모노를 읽으면서 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일반적으로 소설은 흥미 위주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생각하지만, 이 책은 일상 속 평범한 사람들의 선택과 그 결과를 통해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만듭니다.

악의 평범성과 시스템 속 개인의 책임
혼모노 2화의 '9회 집 가동 98번지' 에피소드는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제시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개념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여기서 악의 평범성이란 극악무도한 범죄가 괴물 같은 인물이 아닌 평범한 사람의 무사유와 복종에 의해 저질러질 수 있다는 개념입니다(출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건축학과 교수 여재화와 제자 구보승의 이야기는 단순히 취조실 건물 설계라는 소재를 넘어, 시스템 안에서 개인이 어떻게 양심을 잃어가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저 역시 늦깎이 대학생으로 비슷한 상황을 겪었습니다. 선임 교수가 주체하는 동아리에서 활동하며 교수의 심부름과 학생 관리, 동아리 사업에 매달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학업과 미래를 위한 발판이라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저 역시 주어진 일에만 충실했을 뿐 그 일의 본질이나 옳고 그름을 제대로 성찰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구보승은 욕심 없고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취조실 설계라는 프로젝트에 투입되면서 점차 의욕적으로 변해갑니다. 나선형 계단, 채광창 배치, 방 구조까지 인간이 가장 고통스러워할 공간을 완벽하게 설계해 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보승이 악한 의도를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단지 주어진 과제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일반적으로 악한 행동에는 악한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제 경험상 더 위험한 것은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태도였습니다. 저도 졸업 후 강사 자리를 얻기 위해 교수에게 잘 보이려 애쓰며, 정작 제가 왜 그 일을 하는지, 그것이 옳은 일인지 깊이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구보승의 모습에서 당시의 제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성찰 없는 복종의 위험성에 관한 연구는 꾸준히 이어져 왔습니다.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의 복종 실험에서 보듯, 권위자의 명령 앞에서 평범한 사람들도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을 건드립니다. 구보승이 잘못이 없다고 말하려면 애초에 취조실 건물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거절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고, 여재화 교수 역시 마지막 순간 구보승을 설계자로 등록하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수평적 조직 문화와 관계의 균열
'우호적 감정' 에피소드는 최근 많은 스타트업이 지향하는 수평적 조직 문화의 이면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수평적 조직이란 직급에 따른 위계를 최소화하고 구성원 간 자율과 소통을 강조하는 조직 구조를 의미합니다. 알렉스, 수잔, 진 세 사람은 처음에는 수평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지만, 인사팀의 실수로 성과급이 공개되면서 관계가 금이 갑니다. 시니어 직원인 수잔보다 이직한 진의 성과급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겉으로는 수평적이었던 관계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솔직히 이 부분은 제게도 뼈아픈 대목이었습니다. 대학에서 동아리 활동을 할 때 표면적으로는 모두가 평등한 관계였지만, 실제로는 교수와의 거리, 학년, 실력에 따라 보이지 않는 위계가 존재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 직급이나 권한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면 그동안 쌓아온 우호적 분위기는 한순간에 무너집니다. 억지로 만든 수평적 구조는 오히려 갈등을 키울 수 있으며,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지는 단점도 있습니다.
진의 독단적인 업무 태도와 수잔과의 갈등은 결국 수잔의 퇴사로 이어집니다. 일반적으로 수평적 조직이 좋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구성원 모두가 그 문화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대기업 출신인 진에게는 스타트업의 수평적 문화가 맞지 않았고, 대표는 이를을 제대로 조율하지 못했습니다. '우호적 감정'이란 결국 공적 관계에서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사소한 감정일 뿐입니다.
'잉태기' 에피소드의 서진은 과도한 통제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잃은 인물입니다. 부유한 집안의 딸 서진은 엄마와 시부의 끊임없는 관심과 간섭 때문에 스스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합니다. 원정 출산을 둘러싼 엄마와 시부의 갈등은 정작 당사자인 서진의 의견은 배제한 채 진행됩니다. 공항에서 양수가 터지는 긴급 상황에서도 두 사람의 대립은 멈추지 않고, 서진이 무언가 속삭이지만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이 에피소드를 읽으며 세상에는 아무런 대가 없이 이뤄지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진은 경제적 풍요를 얻었지만 자유와 자기 결정권을 잃었습니다. 과한 집착은 결국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 결말을 초래합니다. 제가 대학 시절 교수에게 매달렸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습니다. 더 큰 것을 바라고 달리다 보니 정작 제가 망가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정의 유통기한과 회복의 용기
'메탈' 에피소드는 이 책에서 가장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우림, 조연, 시유 세 친구는 어릴 적부터 메탈 밴드 '코발트'를 함께 해왔지만, 고3 이후 삶의 변화로 점차 멀어집니다. 특히 조연이 서울 대학에 진학하고 우림과 시우가 고향에 남으면서 우정은 균열을 맞습니다. 오랜만에 셋이 밤바리(오토바이 라이딩)를 하지만 예전 같지 않고, 결국 우림과 조연은 싸움 끝에 절교합니다. 4년 후, 시우의 결혼 소식을 들은 우림은 망설임 끝에 조연에게 전화를 겁니다.
일반적으로 시간이 지나면 우정이 식는다고 생각하지만, 제 경험상 진짜 친구는 오랜만에 만나도 예전으로 돌아갑니다. 이 에피소드는 우정에 유통기한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만 그 우정을 유지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림이 조연에게 전화를 거는 행위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싸움이 발생했을 때 사과를 빨리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라도 먼저 손을 내미는 용기가 더 중요합니다.
저도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들과 한때는 가깝게 지냈지만, 졸업 후 각자의 길을 가며 멀어졌습니다. 가끔 연락이 오면 반갑지만, 먼저 연락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우정을 '발효 식품'에 비유합니다. 차갑게 식어 보이는 우정도 시간이 지나며 발효되어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목 '메탈'도 금속이라는 의미로, 녹슬어도 다시 빛날 수 있는 우정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혼모노는 결국 변화에 관한 책입니다.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인물들은 사건과 갈등, 스스로의 깨달음을 통해 변화를 맞이합니다. 저 역시 이 책을 읽으며 나를 성찰하고 반성하고 양심을 돌아보는 계기를 얻었습니다. 본성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 역시 그러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제가 만약 구보승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지, 지금도 궁금합니다. 어쩌면 저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핑계로 양심을 외면했을지도 모릅니다.
고정적인 관점보다는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용기를 내어 변화를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 책은 생각할 거리와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진정으로 추천할 만한 작품입니다.
참고: https://livewiki.com/ko/content/friendship-duration-bookche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