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혜옹주 비극 (강제유학, 정신병, 귀국)
1912년 태어난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는 14살의 나이에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정신분열증을 앓으며 38년을 보냈습니다. 저도 한때 타지에서 향수병으로 고생했던 경험이 있어서 그랬는지, 이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가슴이 먹먹해지더군요. 환갑에 얻은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어린 소녀가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낯선 땅에서 정체성을 잃어가는 과정은 단순한 역사적 비극을 넘어선 인간의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고종의 사랑과 일본의 전략적 분리
덕혜옹주는 고종이 환갑에 궁녀 양 씨에게서 얻은 외동딸이었습니다. 고종은 덕수궁에 유치원을 세울 정도로 그녀를 총애했고, 왕실 실록에도 덕혜옹주에 관한 기록이 이례적으로 많았습니다. 여기서 왕실 실록이란 조선시대 국왕의 재위 기간 동안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공식 역사서로, 일반적으로 왕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드물었다는 점에서 고종의 애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종은 영친왕이 일본에 인질로 끌려간 것처럼 덕혜옹주마저 빼앗길까 두려워했습니다. 이에 시종 김황진을 통해 조카 김장한과의 비밀 혼약을 추진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었죠. 1919년 고종이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당시 조선 민중은 친일파에 의한 독살을 의심했습니다. 8살의 어린 덕혜옹주는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가까이서 목격했고, 이는 그녀 인생의 첫 번째 깊은 상처가 되었습니다.
고종 사후 덕혜옹주는 조선 민중에게 죽은 임금을 대신하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는 그녀의 일상이 자주 보도되었고, 민족적 관심이 집중되었죠. 저는 이 대목에서 일본이 왜 그녀를 급히 일본으로 데려가려 했는지 이해가 갔습니다. 민중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을 조선 땅에 두지 않으려는 정치적 의도가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강제 유학과 정신병의 시작
1925년 14살의 덕혜옹주는 일본 동경 학습원으로 강제 유학을 떠났습니다. 공식적으로는 '유학'이었지만 실제로는 조선 민중과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는 일본의 전략적 분리였습니다. 일본 도착 당시 덕혜옹주가 침묵과 무표정으로 일관했던 것은 어린 소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서른을 갓 넘겨 제주도로 일자리를 찾아갔을 때도 향수병이 심했는데, 덕혜옹주는 겨우 14살의 나이에 자신을 보호해 줄 가족도 없이 적국으로 끌려간 셈이니 그 심리적 고통이 어땠을지 조금은 짐작이 갑니다. 저는 2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듯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말이죠.
일본에서의 삶은 계속된 공포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버지처럼 자신도 독살될지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고, 1929년 어머니 양귀인마저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여기서 정신분열증이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사고와 감정, 행동이 와해되는 정신질환을 의미합니다. 어머니의 장례식 후 일본으로 돌아간 덕혜옹주는 학교에 가지 않고 식사를 거부하며 방황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녀가 세상과의 끈을 놓아버린 신호였습니다.
일본은 1931년 5월, 정신이 온전치 않은 덕혜옹주를 쓰시마 백작 소 타케유키와 강제로 결혼시켰습니다. 조선 왕실의 마지막 흔적을 일본인과의 혼인으로 지우려는 의도였죠. 개인적으로 이 대목은 정말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병든 사람을 정치적 도구로 이용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역사학계에서는 덕혜옹주의 정신질환을 '강제 이주 트라우마(Forced Migration Trauma)'의 전형적 사례로 분석합니다(출처: 한국정신건강의학회). 여기서 트라우마란 극심한 스트레스나 충격적 사건으로 인해 정신적 외상을 입은 상태를 뜻합니다. 고국과 가족으로부터 강제로 분리된 10대 소녀가 겪을 수 있는 심리적 붕괴를 학술적으로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입니다.
38년 만의 귀국과 낙선재에서의 말년
일본 패전 후 남편 소 타케유키는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했습니다. 1956년에는 딸 마사에가 자살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는 비극까지 겪었죠. 덕혜옹주가 일본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방치되어 있을 때, 고종의 밀명을 받았던 김황진의 조카 김을한 기자가 그녀의 행방을 찾아냈습니다.
김을한 기자는 한국 정부에 귀국을 요청했으나 이승만 정부는 정치적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신생 공화국으로서 구 왕실과의 연결을 꺼렸던 것이 주된 이유였습니다. 이후 김을한 기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덕혜옹주의 사연을 알렸고, 박정희는 민심을 얻기 위해 즉시 귀국을 허락했습니다.
1962년, 덕혜옹주는 3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의식이 온전치 않았지만 평생 그녀를 보살폈던 유모 변복동 씨가 공항에서 큰절로 재회했습니다. 덕혜옹주는 이후 창덕궁 낙선재에서 생활했는데, 낙선재란 창덕궁 내 왕실 가족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되던 전각을 말합니다. 조선시대 후기 왕실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1970년대 옛 남편 소 타케유키가 방문을 시도했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1983년 KBS 취재팀이 촬영한 마지막 모습에서도 그녀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정신이 맑은 날 썼다는 낙서가 공개되었습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아,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라는 글귀는 그녀가 마지막까지 간직했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보여줍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덕혜옹주의 생애는 일제강점기 황족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일제는 조선 왕실을 해체하기 위해 황족들을 일본으로 강제 이주시키거나 일본인과 결혼시키는 정책을 체계적으로 실행했습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덕혜옹주는 이러한 정책의 직접적 피해자였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가 겪었던 타지에서의 고립감이나 향수병 같은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저는 언제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제 의지로 선택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덕혜옹주는 선택권도, 돌아갈 고향도, 보호해 줄 가족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생의 마지막까지 조국을 그리워했다는 사실이 더 가슴 아팠습니다.
덕혜옹주는 생애 마지막을 고국에서 보내며 아버지 고종의 무덤 뒤편에 잠들었습니다. 일본이 조선 민중에게서 그녀를 떼어놓고 기억을 지우려 했지만, 해방된 조국은 끝내 그녀를 잊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가 남긴 이 슬픈 이야기는 우리가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한번 일깨워줍니다. 개인의 비극이 곧 민족의 비극이었던 시대, 그 아픔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후세가 해야 할 최소한의 예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참고: https://livewiki.com/ko/content/kbs-korean-dictionary-last-princ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