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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적 분류의 허구, 통념 깨기, 우생학 비판)

sudajjeongea 2026. 3. 17. 01:38

중학교 시절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파는 장사꾼 아저씨에게 "이 병아리가 수컷인지 암컷인지"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저씨는 모른다고 했고, 저는 그게 이상했습니다. 그때 저는 달걀과 계란이 다른 줄 알았고, 상어는 물고기인데 고래는 포유류라는 말에 무척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제가 품었던 그 순수한 호기심이 사실은 과학적 진실을 향한 첫걸음이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어류학자 조던의 불굴의 의지와 그 이면의 어둠

일반적으로 성공한 학자라고 하면 흔들림 없는 신념과 열정을 떠올립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David Starr Jordan)도 그런 인물처럼 보였습니다. 스탠퍼드 대학교 초대 학장이자 수많은 물고기에 학명을 부여한 당대 최고의 어류학자였으니까요.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그의 표본 건물이 무너졌을 때, 그는 48시간 동안 제자들과 함께 물을 뿌려 물고기 표본이 썩지 않게 했고, 나중에는 물고기 살에 직접 이름표를 꿰매어 보관했습니다.

 

저는 처음 이 이야기를 접했을 때 감동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며 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조던은 루이 아가시(Louis Agassiz)라는 스승의 영향을 받아 생물을 계층적으로 분류하는 사고방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계층적 분류(hierarchical classification)란 생물을 하등과 고등으로 나누고, 이를 통해 자연에 신의 의도나 도덕적 교훈이 담겨 있다고 보는 관점을 의미합니다. 아가시는 심지어 도마뱀이 자손을 더 돌본다는 이유로 어류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조던의 어두운 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스탠퍼드 대학 설립자 제인 스탠퍼드(Jane Stanford)가 의문의 독살 사건으로 사망했을 때, 조던은 자신이 고용한 의사를 통해 이를 '음식 과다 섭취로 인한 신부증'으로 발표했습니다. 이후 그는 이탈리아의 장애인 마을을 방문하고 돌아와 우생학(eugenics) 신봉자가 되었습니다. 우생학이란 유전적 요인을 인공적으로 제거하여 인류를 '개량'할 수 있다는 사이비 과학 이론입니다(출처: 국립생명윤리정책원). 조던은 미국 우생학의 주요 전도사 중 한 명이 되었고, 이는 다윈의 진화론을 심각하게 오독한 결과였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권위 있는 사람의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은 건 아니라는 걸 이 책을 통해 배웠습니다. 조던처럼 뛰어난 학자도 편견과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제게는 위안이 되었습니다.

물고기는 정말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진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물속에 살고 비늘과 지느러미가 있으면 '물고기'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이건 착각입니다. 룰루 밀러는 캐럴 윤(윤계숙) 교수의 『네이밍 네이처』에서 영감을 받아 이 놀라운 사실을 소개합니다. 어류(fish)라는 분류군은 양서류(amphibian)나 포유류(mammal)처럼 명확한 생물학적 특징으로 묶을 수 있는 집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연어, 폐어, 소 이 세 종을 비교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연어와 폐어가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는 폐어와 소가 훨씬 더 가까운 관계입니다. 폐어와 소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공유합니다.

  • 폐호흡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 심장 구조가 유사하다(2심 방 구조)
  • 후두개(epiglottis)를 가지고 있다

반면 연어는 이런 특징들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 '물고기'로 통칭되는 생물들 사이의 차이가, 폐어와 육상 포유류 사이의 차이보다 더 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현대 계통분류학(phylogenetic taxonomy)에서는 '어류'를 단일한 분류군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계통분류학이란 생물의 진화적 계통 관계에 따라 분류하는 학문 분야를 의미합니다(출처: 한국생물과학협회).

 

저는 어렸을 때 바다 속 포유류라는 개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에 산다고 다 물고기가 아니고, 육지에 산다고 다 네 발 달린 짐승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거든요. 하지만 제 경험상 이런 통념을 깨는 과정이야말로 진짜 배움이었습니다. 인위적으로 정한 분류가 자연의 실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는 깨달음 말입니다.

 

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적 사실은 단순히 생물학적 지식을 넘어 저자 룰루 밀러의 삶 전체를 바꿔놓았습니다. 그녀는 7살 때 아버지로부터 "인생의 의미 같은 건 없고,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혼돈"이라는 말을 듣고 평생 우울과 무력감에 시달렸습니다. 16살에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20대에는 연인과의 이별로 깊은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그런 그녀가 조던의 이야기를 연구하면서 배운 건 '내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도 틀릴 수 있다'는 교훈이었습니다.

 

밀러는 자신이 가졌던 또 다른 통념, 즉 '사랑은 반드시 이성과의 관계여야 한다'는 생각도 깨뜨렸습니다. 그녀는 그레이스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양성애자(bisexual)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조던이 저질렀던 우생학적 오류, 즉 인간을 인종·민족·성별·성 지향성으로 나누고 차별하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비과학적이고 비윤리적인지를 그녀는 자신의 경험으로 증명한 셈입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동성 간의 사랑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어떤 생물은 같은 성끼리도 자손을 번식시키는 경우가 있고, 많은 생물이 일반적인 이성 간 번식을 추구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방식은 아닙니다. 인위적으로 정한 통념이 실제 자연의 다양성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와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다'는 깨달음은 같은 맥락입니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순한 자연과학 교양서를 넘어 한 사람의 삶을 바꾼 실존적 회고록이자, 잘못된 과학적 통념과 차별에 대한 강력한 비판서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책은 자주 만나기 어렵습니다. 저자의 탁월한 글쓰기와 예측 불가능한 전개, 그리고 깊은 감동이 어우러진 이 책은 올해 가장 인상 깊었던 독서 경험으로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룰루 밀러가 조던을 통해 배운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한 번쯤 의심해 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진짜 성장의 시작이니까요.


참고: https://livewiki.com/ko/content/book-culture-love-letter-memoir